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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베트남미디어

[배유일의 굿모닝메세지] 능력주의의 배신 혹은 속임수

몇년 전, 어느 대학교의 교수채용을 위한 인터뷰를 하는 가운데 참석자 중 한분이 후보자인 필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그 대학에서는 아무래도 학교의 성격상 여학생이 많은 만큼, 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이슈인데 어떤 철학과 원칙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라 조금 당황했다. 그 짧은 수초 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치는데 얼마나 시간이 길던지. 생각끝에 내놓은 필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아직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능력주의)에 믿음을 가지고 있고, 어떤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실력을 쌓아 경쟁력을 갖고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제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이고, 어떻게 차별화된 도움을 주느냐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할 생각입니다.” 이 대답이 질문자를 만족시켰는지 확신이 없고, 내 대답을 수정하고 싶은 마음도 “아직은” 없다. 그런데 점차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에게 근대와 현대사회를 구분짓는 하나의 원리를 꼽으라면 합리성(rationality)을 이야기하고 싶다. 근대사회가 선천성, 전통, 감정, 관계, 운명으로 엮인 관계라면, 현대사회는 과학적 원리, 법칙, 능률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다. 예컨대 우리가 중학교 시절 배운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F. Tönnies)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개념을 구분하면서 현대사회의 대표적 특징인 이익사회(Gesellshaft)라는 것은 선천적인 유대로 이루어진 공동사회와 달리 합리적 사유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경쟁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그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어쩌면 사람을 고용하고, 보상을 해주며, 때로는 벌을 주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현대사회의 일원인 우리는 어떤 형태로는 조직적인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며, 자신의 선천적 조건이 아니라 적어도 객관적으로 이해할만한 기준에 의해 평가되기를 갈망한다. 내가 노력한 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면 개인적인 좌절감은 물론, 사회에 대한 반감까지 커진다. 각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비례한 보상, 즉 사회적 지위와, 보수, 승진, 명예 등이 다른 어떤 요인도 아닌 개인의 자질과 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것보다 공정한 사회가 있을까? 메리토크라시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하나의 정치철학적 이념으로, 현대사회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어떤 특정 사회적 계층이나 권력자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개인의 자질과 노력에 의해 지위와 부, 명예 등 사회적 재화가 결정된다는 생각은 현대 사회체제의 지배적인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예를 들면 미국의 공무원은 19세기 말 ‘펜들턴 법’(Pendleton Act)이 통과되면서 과거 정치적 연줄이나 소속정당에 의해 등용되던 상황과 달리 정치적 권력에서 자유로운 인사위원회가 설치되고 이곳에서 관장하는 경쟁시험을 통해 임용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유교적 전통이 강한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수백년 전부터 비록 제한적이나마 사회 구성원에게 과거시험과 같은 경쟁절차에 따라 공직에 진출하는 체제를 만들어왔다.

 

아마 현대국가 중 능력주의를 거의 절대적으로 신봉해 온 국가가 있다면 단연 싱가포르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능력주의는 싱가포르를 통치하는 데 있어서 누가 도전을 하건 비판을 하건간에 가장 핵심적인 국가통치의 원칙이었고, 국부 리콴유(李光耀)도 여러차례에 걸쳐 공식석상에서 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음을 밝혀왔다. 종교적인 전통주의가 지배하던 말레이연방에서 떨어져 나오게 된 요인이기도 한 싱가포르의 능력주의는 지난 반세기 동안 도시국가의 좁은 영토와 한정된 인재풀에서 세계적으로도 눈여겨볼만한 가장 경쟁력있는 공직자를 채용하고, 1인당 국민소득 7만불에 가까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필자의 짧은 경험으로도 싱가포르 고위공직자만큼 능력있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급속한 현대화와 경제성장에 파뭍혔던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점차 커져가고 있으며, 그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갈수록 심각해지는 불평등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면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절대적 빈곤수준의 완화에는 어느 정도 공헌한 것이 사실이고, 중국과 같은 경우 지난 30여년의 경제적 굴기(倔起)로 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불평등 지수를 실질적으로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빈곤 수준의 감소가 상대적 빈곤까지 메꿀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시민의 삶의 질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악화되어갔다. 심지어 ‘메리토크라시의 나라’ 싱가포르에서도 지난 10여년 간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옥스팜(Oxfarm)의 보고에서 따르면 싱가포르 불평등 지수가 조사대상 157개국 중 149위에 랭크될 만큼 악화되면서, 능력주의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특히 초등학교부터 인생을 결정짓는 초등학교 졸업시험(PSLE)에 목숨(?)을 거는 싱가포르에서 커져만 가는 교육 불평등은 능력주의에 대한 의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반칙자를 생산하는 능력주의

 

위에서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한 것처럼, 필자는 여전히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능력주의가 반드시 불평등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주류 철학에 세뇌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경제학적 접근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가진 재능과 노력이 보상(rewards)과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한다면 당연히 그 보상을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생산성, 최적의 자원배분 등 사회적 효용도 커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의 혹은 적어도 중립적으로 설계된 능력주의라는 제도가 실제로 시행될 때, 어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예를 들면 ‘능력 = 보상’이라는 수식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노력’에 대한 부분보다 ‘보상’에 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한국의 대입 수학능력시험이나 싱가포르의 초등학교 졸업시험과 같은 경우가 그 예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고득점을 올린 학생이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어찌보면 능력주의에 충실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사회적으로 합의된 능력주의에 대한 관심이 능력보다는 실제로 보상(좋은 학교 진학)에 있다면, 적어도 그 체제가 ‘공정한 절차’였다고 자위할 수는 있겠으나 실질적 공정성까지 담보되는지는 의문인 것이다.

 

첫째, 능력을 평가하는 수단이 적절한 것이냐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싱가포르의 PSLE는 단 한번의 시험으로 중학교 이후의 교육이 엘리트 위주의 교육이냐 직업교육이냐로 나뉜다. 초등학교 6학년때 시험으로 말이다. 한국의 수능도 마찬가지다. 단 한번의 시험으로 평생동안 그 사람의 직업은 물론 평판까지도 갈리게 된다. 그럼 수능 몇 문제로 인생이 바뀌는 그 시험이라는 수단은 정당한 것인지, 정확한 것인지에 의문이 생기게 된다. ‘나중이 창대케되는’ 인재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고, SKY 졸업생들이 전부 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지도 않다.

 

 

둘째, 능력보다 보상에 사회적인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그 ‘능력’ 부문을 메꾸기 위해 정당하지 못한 노력들을 동원하는 인센티브가 생긴다. 즉, 부모의 사회적 지위나 재력 (소위 할아버지의 재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남보다 앞선 출발선을 만드려는 욕망 말이다. 능력을 노력이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해 채우려는 반칙자를 생산하게 되고, 때로는 이를 보상받기 위해 사회적으로 비효율적인 요구를 하며, ‘공정한’ 절차마저 변별력을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중고등학교의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상장들과 대학교에서 ‘A폭격기’ 교수의 생산, 수많은 고시낭인의 존재는 사회적 비효율성을 극대화시킨다. 마치 냉전시대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군비경쟁과 같은 모습이다. 핵무기 하나로도 치명적인데 양국은 수백, 수천기의 핵무기를 만들어댔다. 우리가 이런 불필요한 노력경쟁, 군비경쟁만 줄이자고 합의해도 살만한 세상일텐데 말이다.

 

그러나 가장 우려가 되는 부분은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보상이 자칫 사회적 ‘구별짓기’의 도구로 고착화되는 부분이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으로서, 과거급제를 위해 어머니가 떡을 써는 동안 입신양명을 위해 열심히 공자왈 맹자왈을 공부했으나, 정작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벗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으로부터 구별되는데에만 관심이 있을 때 문제라는 것이다. 고등고시를 합격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해외에서 공부까지 한 어느 고위공직자가 국민을 ‘개, 돼지’로 묘사한 사례를 기억하는가. 능력으로 받은 보상이 정당한 자기만족을 넘어 남으로부터 구별되는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내고 공고화하는 데 쓰인다면, ‘능력=보상’이라는 것은 한낯 의미없는 구호에 불과하며, 낭비적인 요소일 뿐이다. 단지 그나마 절차(시험)라도 공정했으면 하는 자포자기적 심정을 양산할지 모른다.

 

한국에서 능력주의로 보통 번역되고 있는 메리토크라시는 라틴어로 능력과 권력을 뜻하는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조어(造語)로서 단어의 의미에 숨겨진 부정적인 의미가 배제된 채 영어단어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능력주의의 속임수에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적 인내가 임계치를 이미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Fulbright University Vietnam 정책대학원 교수 배유일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USC) 정치학박사 | 전 싱가포르경영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한국의 이중적 지방 민주주의>, <Mega-Events and Mega Ambition> 등의 저서와 논문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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