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Joe Biden)이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 전까지 유력 후보 중 한명이었던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는 유럽 좌파정당보다도 더 급진적인 공약때문에 소속 정당에서 조차 우려섞인 비판을 받았고, 결국은 대선후보로 선출되는데 실패하였다.
그 자신은 ‘북유럽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해명해왔지만, 그의 무상교육, 보편적 의료보험,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에 대한 공격 등은 ‘북유럽식’ 실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 때문에 몇몇 논란이 되는 국가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는데, 특히 그는 우고 차베스(Hugo Chavez, 1999-2013) 치하에서 많은 복지정책을 집행한 베네수엘라를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차베스-마두로(Maduro)로 이어지는 베네수엘라 정권의 실상은 ‘민주적’인 정치와는 매우 큰 간극이 있었고, 친위쿠데타, 야당에 대한 탄압, 언론 통제 등으로 나타난 비민주적 현실은 샌더스에게 책임있는 설명을 요구하는데 이르렀다. 그동안 베네수엘라는 샌더스 말고도 많은 호사가(好事家)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도대체 베네수엘라는 어떤 나라이길래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 것일까?
기름 한방울 나지않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네수엘라는 그야말로 배부른 원유부국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최대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때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1인당 GDP가 높은, 소위 잘나가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어떤가? 유엔난민기구(UNHCR)나 여러 국제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정치적 불안정, 식료품 등 필수물품의 절대부족과 수급불안,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340만명에 이르는 국민이 국경을 넘어 이웃나라로 탈출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총인구가 3천2백만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10%가 넘는 국민이 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국제기구들은 빈곤과 정치 불안정으로 국경을 넘는 모험을 강행한 난민 숫자가 최대 5백만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다. 가히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 땅을 탈출한 엑소더스(Exodus)에 비견될 정도다.
그렇다고 성공적으로 탈출한 이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콜롬비아, 페루, 칠레 등 인근 국가에서는 합법적인 체류신분(이민, 난민 지위)을 취득한 베네수엘라 국민이 4분의 1에도 채 미치지 못하며, 불법체류를 하는 사람들은 성매매, 착취, 인신매매, 외국인 혐오범죄 등에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합법적 이민을 한 베네수엘라인에게도 현지인의 시선이 좋지 못하다. 더구나 코로나바이러스의 남미에서의 대유행은 상당수 국가들이 빗장을 더욱 철저히 걸어잠그고 통제하도록 하여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이들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실정이다.
남아있는 자들에게도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치킨 배달료를 2-3천원 올려도 불매운동이 일어나는 우리나라에서 만약 한달 전 닭 한마리 가격이 1만원이었는데 지금 1만 7천원 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매달 치킨 가격표를 바꿔야 한다면?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베네수엘라에서 현재 닭 한마리를 사려면 엄청나게 많은 지폐를 지불해야한다. 살 수 있는 닭 자체도 부족하거니와 화폐가치가 휴지조각에 가깝다. 오히려 지폐를 모자란 화장지로 대체해야할 정도다.
이처럼 베네수엘라 경제는 말 그대로 파탄상태다. 베네수엘라는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 물가상승이 통제를 벗어난 상태)을 수 년째 겪고 있으며, IMF의 예상에 따르면 2018년 물가상승이 백만퍼센트에 달한다고 할 정도다. 특히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은 전 국민의 영양실조를 가져왔고,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베네수엘라의 흥망
왜 자원부국인 베네수엘라가 이렇게까지 몰락하게 되었을가? 자원부국이 경제적 침체와 민주주의의 후퇴를 겪게 된다는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의 전형적인 사례일까? 아니면, 차베스 이후 지속된 포퓰리즘적 퍼주기식 복지정책 때문인가? 아니면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의 이야기처럼 미국의 제제 때문일까?
우선, 1999년 집권한 반미성향의 차베스 정부는 석유, 철강 등 돈이 되는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친위쿠데타 등을 통해 오랫동안 지배하였으며, 특히 미국의 버니 샌더스가 칭찬할 정도로 사회프로그램을 확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 유가의 이상 폭등현상은 차베스 정권에 오일머니를 가득히 안겨주면서 교육, 의료, 식량, 주택 등 사회복지 혜택을 3천만 국민에게 ‘사회적 형평’을 강조하며 무차별적으로 제공하였고, 실제로 빈곤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000-2013년 사이에 사회복지에 쏟아부은 금액은 GDP의 40%에 달하며, 이는 OECD 평균 사회지출의 두배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당연히 정권에 대한 하층민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무상혜택 등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위해서 국가화한 석유산업 등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결과적으로 패착을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차베스 자신도 국가경제의 다양화를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도한 복지지출은 결과적으로 원유수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심화시켰고, 95%에 달하던 석유의존도는 2014년 이후 유가폭락과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 등으로 된서리를 맞으면서 국가경제기반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복지에의 지출로 생산설비 재투자에 인색하게 되었고, 반미주의 성향때문에 기술력을 갖춘 메이져 석유회사들을 쫓아내는 바람에 생산성 자체도 매우 떨어졌다. 원유를 보관할 저장고조차 충분하지 않아 최대매장량을 가지고도 많은 생산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장가 이하로 원유를 판매해 온 것도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결국 부족한 국고를 메우기 위해서 볼리바르 화폐를 더 찍어내는 결정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이것도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석유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와 과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으로 결국 정부가 배급하는데 어려움을 겪게되자 민심은 바로 응답하기 시작하였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는 져버린지 오래며, 약탈과 강도가 일상화되었다. 사회적 불만으로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차베스의 후임인 마두로는 오히려 야당, 시민, 미디어를 탄압하고, 오히려 현 상황이 ‘21세기형 사회주의’를 내세운 자신들에 대한 미국의 제재때문이라며 책임을 돌렸다.
미국이 마두로와 부패한 정치인들이 불법적 금광채굴과, 국유화된 유전 및 기타 사업을 독점하여 불법적으로 이득을 취하여 인권유린과 범죄행위를 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결정한 경제제재 탓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저명 브레인집단인 브루킹스연구소와 하버드대 연구진 등 여러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경제적 붕괴는 이미 2017년 미국 독재정권에 대한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기 훨씬 이전부터 심각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정치인들의 편견의 동원
베네수엘라의 몰락은 물론 단순히 포퓰리즘적 복지정책, 자원의 저주, 혹은 미국의 제재 때문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한 나라의 경제, 사회, 정치가 그렇게 간단하게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국가경제개발을 위해 생산수단의 다양화와 현대화, 시장의 질서유지, 국가경제 수준을 뛰어넘는 과도한 복지지출이 결국은 정치적 불안정을 가중시키고 총제적인 위기를 불러왔다. 미국의 제재는 이미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이었다. 정치인의 선택은 그래서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4차산업혁명과 생산수단의 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서 예측가능하다. 아마도 어느 순간, 기본소득과 같은 현금성 복지가 규칙적으로 지급되어야 할 때가 곧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작은 규모라도 실험해보는 것도 좋은 생각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두고 열린 마음으로 토론해야 한다. 스웨덴의 복지국가로의 길이 1930년대 말 ‘생산성 증대가 곧 효율과 과실의 공유’라는 사회적 대타협에서 시작되었듯이 어느 한 정파의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대대적인 사회적 토론과 공감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추구하는 아젠다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불리한 정보는 감추는 행태는 지양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흔히 자신이 추구하는 주장이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동원하고는 한다. 샤츠슈나이더(Schattschneider)라는 학자는 이를 ‘편견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라고 부른다. 정치인은 실패를 인정하거나 자신의 입장에서 후퇴하는 것을 정치적 패배라고 흔히 생각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관철하려 하지만, 책임있는 국가의 리더라면 보다 신중해야하지 않을까.
기본소득이나 복지확대를 두고 매스미디어의 댓글을 보면 정신이 아득하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현실을 모르는 글쟁이들의 속좁은 태클이나 기득권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돈이 없으면 더 찍어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러나 정치인은 그러면 안된다. 그 자리에 앉혀준 국민은 정치인들에게 보다 엄중하고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하며, 그들의 선택이 국가의 명운을 가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풀브라이트 대학 베트남 정책대학원 교수 배유일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USC) 정치학박사 | 전 싱가포르경영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한국의 이중적 지방 민주주의>, <Mega-Events and Mega Ambition> 등의 저서와 논문의 저자.